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(문단 편집) === 오스만 제국판 [[배후중상설]] === 이 와중에 1877~1878년에 벌어진 [[러시아-튀르크 전쟁|튀르크-러시아 전쟁]]에서 [[러시아]]에게 패해 [[불가리아]], [[세르비아]], [[몬테네그로]] 등 지배하던 동유럽 속령들을 독립시키고 허구한 날 털리기 시작했다. 낡고 비효율적인 내부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골골거리면서 유럽의 환자(sick man of Europe) 라는 소리를 듣던 것이 이 시대 오스만 제국이지만[* [[유럽 연합]] 경제 위기 등에서도 사용되면서 약간 보통명사 느낌이 드는 단어지만 이 단어의 기원은 이 시대의 오스만을 칭한 것이다. 다른 사람도 아닌 러시아 황제가 최초로 사용했다.] 패전국이 겪는 전형적인 [[인지부조화]] 속에 이 모든 것을 동부 지역 기독교인들이 러시아와 짜고 벌인 짓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. 또 이 시기 불가리아에서는 이슬람교도 50여만 명이 학살, 약탈, 강간을 당했는데 이때 고생깨나 하고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 처지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했다. 결국 돌고 돌아와서 애꿎은 이들이 피해를 당하는 셈. 하여튼 전반적으로 이 시기 오스만은 [[1차 대전]] 직후 독일이 '[[배후중상설|내부에서 등을 찌르는 바람에 진 거다]]' 운운한 것과 소름돋을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. [[러시아 제국]]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[[캅카스]] 일대를 상실했던 시점에서부터 [[발칸 전쟁]]에서 패하고 1차 대전이 터지는 시기 까지 1~2백만 사이의 [[발칸 반도]], 캅카스에서 쫒겨난 무슬림 난민들이 코스탄티니예, 트라브존, [[이즈미르]] 같은 도시들의 거리를 꽉 매웠고, 이들이 러시아나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게 당한 수모와 핍박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에게 전하면서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믿지 못할 내부의 적이라는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다. 문제는 나중에 같은 이슬람이라고 여겼던[* 물론 아랍 무슬림들은 오스만 치하에서 3등 신민으로 기독교인보다 밑으로 여겨져 같은 무슬림 같은 소리 하네 하고 반발했지만.] [[아랍]] 쪽에서도 오스만에게 반발이 일어나면서 이젠 단순히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닌 튀르크 민족주의로, 종교적 정체성까지 무너지고 아랍 무슬림들까지 견제하기 시작했다. 결국 이들이 기독교인 영국과 손잡고 오스만에 저항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장면은 영화 [[아라비아의 로렌스]]에도 등장한다. 정작 독립하고 나자 영국이나 프랑스는 약속을 다 저버리고 이들을 강압으로 지배했지만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